2016. 8. 3. 10:23ㆍSomething that i've got small talk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4분,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이 이뤄졌습니다.
상황을 지켜본 통역사 소노키 스에키는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매우 침착하며 안색과 말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일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종용자약(從容自若)하게 깨끗이 그 죽음으로 나아갔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당시 일제의 감옥법 74조에 따르면 사망자의 친구나 친척이 원할 시 유해를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안중근의 동생인 안중근, 안공근은 여순 감옥을 찾아 유해를 돌려줄 것을 청했지요.
그러나 일제는 안중근의 무덤이 갖게 될 상징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유족들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명목상이기는 하나 아직 대한제국이 주권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건 국제법 위반이고, 동시에 일제 자신들의 법도 어긴 것입니다.
당연히 일본 내 언론 중에서도 이를 비판적으로 보도한 신문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재판부터 사형집행까지 불법적인 것 투성이었으니까요. 일제는 세계와 자국의 여론 악화를 감안하는 게 낫다는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만큼 그들 입장에서 안중근은 살아있든 죽어있든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여순감옥을 찾은 안중근의 동생들은 강제로 쫓겨나야만 했으며 안중근의 유해는 여순감옥 근처 어딘가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 정확한 위치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지요.
안중근의 유해 발굴을 첫 번째로 계획한 사람은 바로 김구입니다. 김구는 오래 전부터 안중근 집안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지요.
그런데 사실 초장부터 그렇게 좋은 관계였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구는 황해도 해주지역 동학군에 참여했던 인물이고, 안중근과 그의 아버지 안태훈은 이들을 진압하는 쪽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안태훈이 김구의 인물됨을 좋게 보았는지 동학군이 진압 된 뒤 갈 곳이 없어진 김구를 보호해 줍니다. 이 인연이 쭉 이어진 것이지요. 안중근 사후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사촌 안명근 등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여하튼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김일성을 만난 김구는 안중군의 유해를 함께 찾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점령지인 여순 출입이 어렵다며 통일 이후에 추진하자고 답합니다. (참고로 안중근 의사는 남북한이 함께 존경하는 몇 안 독립운동가 중 한 명입니다)
김일성의 대답이 아쉬웠던 김구는 자신의 비서이자 안중근의 조카인 안우생을 평양에 잔류시켜 안중근의 유해 발굴에 힘써달라는 전언을 남깁니다. 북한에 있던 안우생은 훗날 1970년대에 발굴 단장 자격으로 여순을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북한은 1986년에도 대규모 발굴단을 파견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지요.
한편 남한에서의 유해 발굴 움직임은 김구가 암살당한 이후 관심이 뚝 끊기게 됩니다. 아무래도 여순이 중국의 영토(소련이 1955년에 반환)인 만큼 냉전 체제 아래에서 이곳에 발굴단을 보내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요.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서 안중근에 대한 관심이 다시 증폭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국회의원 박영록이 ‘광복이 되면 유해를 고국으로 이장해달라’는 안중근의 유언을 거론하였고,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 발굴 작업을 요청했다는 사실도 새롭게 조명되었지요.
1982년에는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졌는데, 이 와중에 일본 국토청장관인 마쓰노 유끼야스가 “한국 교과서가 이토 히로부미를 원흉이라고 부르며 암살자인 안중근을 영웅시한다.”는 망언을 터뜨리며 국내 여론이 대폭발합니다. 이로 인해 독립기념관이 만들어지고 안중근의 유해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활성화되지요.
1984년에 발굴계획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다음 해에 조사단이 파견됩니다. 그러나 이미 여순감옥 일대는 1930년대 이후 여러 차례 개발이 이루어지며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사단은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없었다는 비관적인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실패를 거듭해야만 했습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재개되고 중국의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기기는 했으나 진행은 지지부진 했지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안중근 의사는 천주교인입니다)’, 故김영광 의원이 중심이 된 ‘안의사 유해봉환의원회’ 등의 노력이 있었을 뿐, 국가차원의 조사는 한동안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IMF 외환위기 등으로 인해 잠잠해진 유해발굴의 국가적 노력이 재개된 것은 2004년입니다. 당시 동남아국가연합 정상회의에 참여한 노무현 대통령이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에게 협력을 요청하며 유해발굴사업이 급물살을 타게 되지요.
2005년에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구체적인 계획안이 수립되었고 2008년에는 남북한의 합작연구를 바탕으로 중국과 남한이 공동발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북한은 발굴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지요.
수차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해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것은 국내의 자료만으로는 발굴 위치를 비정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여순감옥 뒷산에 묻혔다는 추정 외에도 추정 학설이 6가지나 되지요. 자료가 너무나 부족하기에 명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고, 여순 일대 광범위한 지역을 다 조사해봐야 하기에 이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때문에 이 문제는 한중일, 그리고 북한의 협조가 중요합니다. 중국의 경우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만큼 상당히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새롭게 진행될 발굴계획은 모두 중국과의 협조를 기반으로 짜여 지지요. 현재 국가보훈처는 주변을 훼손하지 않고 매장 물체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투과레이더 조사를 중국 측에 요청한 상태입니다.
일본 안에는 안중근을 높게 평가하는 지식인들이 상당히 많지만 일본 정부가 딱히 협조적이지 못합니다. 일본 내 자료가 공개된다면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적어도 아베 신조 임기 중에는 별 진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2013년에 아베정부의 관방장관이 안중근을 폄하하며 유해발굴에 협조하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의식이 의심스럽다와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빡친 중국은 원래 박근혜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 표지석을 세우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아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세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안중근의 고향이 황해도인 만큼 북한 내 증언이나 혹시 남아있을지 모르는 자료 확보도 중요한데... 잘 아시다시피 윗동네 돼지 놈이 미사일을 뻥뻥 쏘고 있는지라 한동안은 힘들어 보입니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는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삼의사 묘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유골이 없는 가묘가 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견된다면 이곳에 묻히게 될 예정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조국이 주권을 찾는다면, 자신을 조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와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주권을 찾았으나 그의 유해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이지요. 하루 빨리 안중근 의사가 효창공원에서 편히 잠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5분한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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